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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청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여진

의열단과 김원봉의 일제강점기의 신문기록

 




모두 독립운동가이시며 호국영웅이라 칭하는 분들입니다.

많이 알고 있고, 교과서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항일독립운동가 중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니 훨씬 더 많습니다.

2018년 6월 현재, 국가보훈처 자료에 의하면, 공적조서와 공훈록 작업으로 선정된 독립유공자가 14,879명, 이 중에 후손이나 가족을 찾지 못한 유공자분들도 무려 5,616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에 포함되지도 못한 채 잊혀진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숨겨져있던 항일투쟁의 전설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명의 배신자도 없이, 단 한 번도 손에서 총을 놓지 않고,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웠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의열단과 그 의열단을 이끈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입니다. 1920년 의열단을 만든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분들입니다.

지난 2016년 개봉되었던 영화 ‘밀정’에 나왔던 등장 인물과 배경이 바로 의열단 항일투쟁을 모티브로 김시현과 황옥의 폭탄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을 보면,

김원봉 - 장채산(이병헌 역), 김시현 - 김우진(공유 역), 황옥 - 이정출(송강호 역),현계옥 - 연계순(한지민 역)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같은 사건은 아니지만, 의열단원이었던 김익상(박희순 역) 의사와 김상옥 의사도 비슷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장채산(실제인물은 김원봉) 역으로 나왔던 이병헌의 대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포기를 모르는 항일투쟁을 묘사한 대사로 보여집니다.

아래 사진은 그 당시 실제 신문 기사속의 김시현(공유역), 황옥(송강호역)의 모습입니다.

의열단과 김원봉! 그 치열했던 항일투쟁들 중에 일부를 소개합니다.



부산경찰서 폭파의거 그리고 박재혁 선생

 
1920년 당시 의열단에서는 일명 '진영사건(進永事件)' 등으로 인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계속 부산경찰서에 붙잡혀 고문, 투옥되자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를 암살하기로 합니다.

당시 싱가포르에 있던 박재혁은 상해에서 김원봉의 지시를 받고, 일본 나가사키(長岐)와 쓰시마 섬(對馬島)를 거쳐 부산에 잠입하였습니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적 상인을 가장하여, 부산경찰서를 직접 찾아가 부산경찰서장 면전에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 의거로 하시모토 서장은 중상을 입은 뒤 사망하였고, 박재혁 역시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옥중에서 자결하기 위해 단식으로 싸우다 사형이 집행 전인 1921년 5월 27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1921년 5월 17일자 신문기사 중 박재혁 선생의 옥중 순국을 알리는 내용)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염려해 준 덕분인 듯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거사 전에 김원봉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이 후에도 의열단원이었던 김익상 의사, 김상옥 의사, 나석주 의사의 항일투쟁은 계속 되었습니다.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 김익상 의사 


김익상 의사는 김원봉을 만나 그의 뜨거운 애국심에 감복하여,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었고, 1921년 9월 9일, 김익상 의사는 김원봉 선생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북경을 출발합니다.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당시에는 무기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오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게 서울에 도착한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사를 하러 그의 아우와 아내, 딸 아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일본 전기 수리공 차림을 하고 남산에 있던 조선 총독부 청사로 향했습니다.

조선 침략의 거점인 총독부는 일제의 심장과도 같은 장소였습니다. 의사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처단하려 했고, 일제의 심장을 겨냥하여 폭탄을 터트렸던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 의거로 인해 커다란 충격을 받고,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잠잠해진 줄 알았던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음을 일본에게 보여준 거사였습니다.

 

당시 위 신문기사의 내용을 보면,

기염만장(氣焰萬丈)의 김익상(金益相)

"김익상은 호송되는 도중에 태연자약하게 양식과 우유를 먹고 밤에는 근심 없이 잠을 자는 고로 호송하던 두 순사도 혀를 내둘렀으며 김익상은 차중에서 신문기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 2 김익상, 제 3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大官)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 독립을 이루기 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정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고 호기 있게 말하였다는데… (후략)"

  

의열단원의 필독서. 신채호 선생의 의열단 선언

  

그리고 의열단의 김원봉의 부탁으로 만들어진 흔히 의열단선언이라 불리는 단채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원의 지침이자 필독서였다. 삼일운동 이후 항일투쟁에서 평화적·외교적 방법을 배척하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혁명적, 투쟁적 방법을 주장했으며, 항일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 선생도 의열단원이었다.

 


 

대일항쟁기에 가장 치열하고 가장 처절하게 일제와 싸웠던 의열단과 김원봉.

의열단과 김원봉선생은 항일투쟁 시절, 민족화합과 통일전선을 주장했고, 해방정국에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민족의 분단을 막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남에서도 북에서도 좌절하며,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왜곡되고 굴곡진 슬픈 현대사라 할 수 있습니다.

(1941년 3·1절 22주년 기념식에서 자리를 함께한 김구·조소앙·신익희·김원봉(왼쪽부터)

가장 처절하게 싸웠던 분들이 아직도 해방 전후 월북 행적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갇혀 외면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남과 북이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려하고 있습니다.

항일투쟁을 위해 모든 걸 바쳤던 의열단과 김원봉 선생에게 그동안 외면하고, 반목했던 편견들을 해소하고, 의열단과 김원봉 선생이 보여준 경이로운 조국 사랑과 항일투쟁의 열정에 감사하며, 그 사실을 기록하려 합니다.

 

 

1920년부터 발간되어 1940년에 폐간된 그 당시 신문에는 대일항쟁기의 많은 소식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대부분이 한자(漢字)로 돼 있고, 또 당시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으며, 지금과는 다른 맞춤법과 표기의 한글로 활자화된 문장들이 대부분입니다.

불과 100년도 안된 기록들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낡은 종이에 써 진 그림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이것은 그저 하나의 유물이 되고 말 것이며, 누군가에 필요에 의해 왜곡되어 지거나 기록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 역사에 대한 반성도 없어질 것이고, 그러면 또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무일근대기록물연구소에서는 대일항쟁기의 신문 뉴스를 오늘의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책자로 남겨 다음 세대에 거울로 삼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기획으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 선생과 의열단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신문기록을 모두 찾아 번역해 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과거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어떤 분들의 노력이 있었는가를 밝히고 알리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며,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이 그 분들에 대한 후손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항일투쟁의 최전선에서 가장 치열하고, 격렬하게 싸웠으며,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과 의열단장 김원봉선생. 여러분과 함께 잊혀진 그 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프로젝트 진행 일정 및 리워드 

- 자료 수집 및 정리 : 2018년 3월 1일 ~ 6월 30일
- 편집 및 디자인 : 2018년 6월 1일 ~ 7월 15일
- 교정, 교열, 감수 : 2018년 7월 1일 ~ 8월 5일
- 인쇄 : 2018년 8월 6일 ~ 9일
- 배송 : 2018년 8월 10일 부터 배송 예정

후원하시는 모든 분들의 이름을 책 뒷면에 인쇄해 기록으로 남기고,
3만원을 후원하시는 분에게는 책 1권,
5만원을 후원하시는 분에게는 책 2권을 보내드립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인 금액은 책자를 만들기 위한 번역, 편집, 출판 비용과 배포 비용 등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역사의 빈 구석을 채우고 기록하는 연구소

무일근대기록물연구소 


우리 역사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 ~ 1940년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매우 제한적인 스토리만 반복해서 소비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엄청난 진실들이 잠자고 있습니다. 이렇듯 묻혀 있는 역사를 발굴해 한국 역사의 빈 구석을 채워 넣고 오늘을 사는 우리와 후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2017년 세운 연구소입니다.

이 아카이브, 출판 작업은 향후 근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 문화유적에 관한 연구, 시대의 생활상 연구 등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되어 많은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만든 이]

 

*위 모든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