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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미화 편
김미화씨는 <이이제이> 첫 번째 콘서트에 축하 메세지를 보내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미화씨는 우리 방송의 취지, 목표, 내용에 무척 공감해 주었고 묵묵히 뒤에서 <이이제이> 방송을 지금까지도 응원해주고 있다. 일례로 김미화씨가 MBN 시사프로그램을 잠시 맡았을 때는 일부러 나를 시사평론가로 추천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김미화씨는 자신이 한 추천을 나에게 알리거나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때 티 안나게 조용히 도와주는 그녀의 인자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따뜻한 생각들을 나만 알고 있기보다는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이것이 인터뷰의 첫 상대로 김미화씨를 선택한 이유이다.
아내가 만삭으로 집안에만 있는 것을 답답해 할 때, 내가 가장먼저 떠올린 장소가 용인의 ‘카페 호미’ 이다.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면 ‘카페 호미’에 잠시 들러 커피 향을 음미하며 피자 한 조각 먹어보는 건 어떨까? 그곳엔 꽃도 있고, 이름 모를 들풀들도 있고, 강아지도 있으며, 사람냄새도 나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볼 수도 있다. 그곳에 가면 순악질 여사라는 이름과는 영 다른 따뜻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카페 여주인이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다.
이동형(이하 ‘이’로 표기) - 독자 여러분. 오늘 이작가가 만난 사람에서 모실 분은 ‘순악질 여사’로 시대를 풍미했던 개그우먼 김미화씨 입니다. 벌써 몇 년째입니까. ‘순악질’ 이란 타이틀이... 이십 년이 훨씬 넘으셨죠?
김미화(이하‘ 김’으로 표기) - 어휴 그럼요, 한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죠.
이 -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다.” 혼자만의 생각입니까? 객관적인 시선입니까? (웃음)
김 - 어! 그건 객관적으로 다 증명이 됐죠. 또 제가 시사프로니 이런 방송 안한지 일 년 좀 넘었지만 여기 시골에 있어도 저 보고 싶어서 찾아오시는 분들이 뭐 인산인해에, 앞에 막 줄을 서시오! 좍~좍~~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문득 듭니다. (웃음) 그래서 찾아 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하지요.
이 - 그래요, 지금 말씀 하신 것처럼 여기는 야외인데 경치나 공기가 굉장히 좋아요. 뒤에 산도 있고...
김 - 시골이에요 시골. 아이고~저기 보세요. 저기 익룡이 날아가고 있네요. (웃음)
이 - 그러네요. 새도 울고 있고... 여기가 용인에 위치한 김미화씨가 운영하시는 “호미”라는 카페이죠?
김 -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주변이 너무 예쁘죠. 논에 벼가 익어가고 있고 흔히 우리가 황금 들판이라고 하는데 너무 예쁘죠. 색깔이... 저도 여기에 벼를 심었는데요. 천이백평 논에 흑 찹쌀을 심었어요. 카페 앞에는 배추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토마토도 있고 생강, 토란, 파프리카... 별게 다 있습니다. 이곳에 또 우리 동네 농부님들이 힘들게 농사지으신 것도 호미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팔기도 해요. 서로 돕고 사는 거지요.
이 - 용인생활이 십년 되었다고 들었는데 전원생활 어떠세요? 농사도 처음 지으셨죠?
김 - 너무 만족합니다. 정말 만족해요. 용인에 산다고 해서 자연하고만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구요. 서울을 왔다 갔다 했어요. 시사프로 하던 그 시기는 전부 용인에서 왔다 갔다 했던 시기였거든요. 참 좋았어요. 농사일도 처음이지만 우리가 어릴때 시골에서 흙 주워먹고 살던, 엄마가 일하시면서 나무에 기저귀로 묶어 놓으면 흙 주워먹고 지냈던 그 기억이 어렴풋이 나서 기쁘게 생활하고 있는거 같아요.
이 - 코미디언으로 계속해서 활동 하시면서 바쁘게 생활 했는데 이렇게 “시골에 와서 생활 해야겠다.”라고 생각 했던 직접적인 계기가 있습니까. 왜 도시를 버리고 전원생활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김 - 원래 제가 신갈에서 태어났어요. 그 후, 아버지가 일찍 서울로 올라가셔서 미아리 돌산 밑에서 살고, 또 수유리, 화계사, 우이동, 방학동에서 살았는데 주위가 다 논밭이었어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살았지만 변두리였기 때문에 환경이 지금 제가 사는 이곳하고 비슷했죠. 어린 시절 큰댁을 내려오거나 아버지하고 손잡고 같이 고향에 내려오면, 오빠들이 해주는 자연에서 얻는 산딸기나 미꾸라지를 잡아서 먹었던 기억들이나, 지나가다가 밭에 있는 무를 쑥~ 뽑아가지고 이로 깎아서 먹던 생 무의맛 , 이러한 것들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이 - 어릴 적 향수?
김 - 예. 향수일수도 있고요. 도심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보니 도심생활에 지쳤다? 이런 느낌일수도 있고요.
이 - 자제분들이 계신데 여기는 부부 두분만 살고 계신거죠?
김 - 우리 애들은 처음부터 여기 따라오지 않았어요.
이 - 전원생활이 이렇게 좋은데 자제분들에게 이런 삶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은 있습니까?
김 - 애들한테 강요할 일은 아니죠. 저희 부부가 좋아서 선택한 곳이고 우리 부부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온전하게 우리가 이 좋은 공기와 좋은 물과 좋은 자연을 즐길 수 있다라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들은 애들 나름대로 도심, 홍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걔들은 걔들 좋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살고 저희는 저희가 좋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살고, 인생이 다 각자라고 생각해서 애들 인생은 애들이 책임지는거 라고 생각해요. 우리 인생은 우리가 풍요롭게 만드는 거고 말이지요.
이 - 김미화씨는 서울 왔다 갔다 하시고 남편 되시는 분도 학교 왔다 갔다 하시고 (남편은 성균관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 카페도 하시면서 직접 농사도 지으시니 이곳 전원생활이 어떻게 보면 도심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더 바쁘실 것 같아요.
김 - 진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빠요. 꽃도 제가 다 심어야 되고, 잔디도 다 깎아줘야 되고, 풀도 솎아 줘야 되고, 농사도 지어야 되고, 오는 손님들 맞아야 되고, 또 주말에는 여기서 공연이 열리거든요. 오늘도 네덜란드 팀들이 와요. 그런 팀들이 오면 그들이 할 공연 준비도 해야 하지요. 근데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여기가 교통편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외진 곳이고 또 위치가 생뚱맞잖아요? 논밭 한 가운데 있는 카페. “그게 뭐야?” 이렇게 생각 할 수 있는데, 정말 희한하게 많이들 오셔서 공연도 즐기고 문화행사도 보고요. 더군다나 이곳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너무 좋아하세요. 여기는 문화에 목마른 분들이잖아요. 이 분들이 땡볕에서 농사짓다가 예술의 전당으로 갈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예술의 전당이나 정말 큰 무대에서 하는 그런 문화 예술인들이 시골로 온다` 라는 개념이에요.
이 - 방금 정말 중요한 말씀 하셨던 거 같은데, 대부분의 시골에서 보면 서울에서 누가 오면 왔다가 잠깐 있다가거나 뭐 그렇게 해서 동네 분들이랑 도시에서 새롭게 이사 오신 분들이랑 트러블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지금 말씀하신 그런 건 전혀 없다, 오히려 “동네 분들이 좋아 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김 - 오히려 여기 시골에 계시는 토박이라고 하시는 어른들과는 시비가 없었어요. 근데 도심에서 내려오신 분들. 그러니까 내 땅 한 평이 귀한 분들. 남의 땅 다 밟고 들어오면서 내 땅은 못 밟게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분들하고는 약간의 갈등은 좀 있지만, 뭐 거기에 굴복해서 제가 비굴하게 살지는 않아요. 바른 것, 바르지 않은 것. 이것은 구분해서 말씀을 드리죠.
이 - 남편 분하고는 결혼 몇 년 째십니까?
김 - 십년 정도? (김미화와 그녀의 남편은 재혼부부이다.)
이 - 근데 애들이 안 따라왔잖습니까? 두 분만 계시는데 아직도 신혼부부처럼 지내고 계십니까?
김 - 아직도가 뭡니까? 저희는 앞으로도 그럴 건데요. 저희는 그냥 친구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예요. 편해요, 헌 신발처럼.. 정말 헐렁헐렁 합니다. 서로 간섭 안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어요.
이 - 재혼하시고 십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신혼처럼 지내신다고 하니, 혹시 이혼을 고민하시는 분들 혹은, 이혼을 했기 때문에 재혼을 두려워하시는 분들, 이런 분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씀 같은 것 혹시 있습니까?
김 - 우리 사회에서 이혼이라는 것이 힘든 거죠. 여자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더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라든지 아니면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또 직장에서 불이익은 없을까? 또 사회생활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상한 눈길을 보내지는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있어요. 근데 어쩝니까! 인생이 살다보면 꼭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에요. 내가 한 선택이 꼭 바르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선택이 바르게 안 됐을 때 그것을 감내하면서 고통 속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내가 정말 심각하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인생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이 인생을 어떻게 꾸려 갈 것인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난데… 깊이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헤어지는 수밖에 없더라... 하면 헤어져야 하는 거예요. 저는 저희 아이들에게도 “너희들이 선택한 남자가 정말 행복하게 끝가지 살면 좋은거고 만약에 그렇지 않은데 참거나 그러진 말아라. 엄마한테 얘기해. 또는 아빠한테 얘기해. 얘기하면 우리가 봐줄게” 그러나 꽁꽁 숨기고, 나 이만큼 괴로운데 이러면서 혼자서 우울증 걸리고 그럴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지는 마라” 라고 이야기해요. 그런 시선을 너무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뭐 남이 내 인생을 살아줍니까? 내 인생은 내가 행복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이 - 다른 이야기 좀 해보죠. 데뷔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김 - 삼십 일 년째죠.
이 - 삼십 일 년째면 공채로 몇 기십니까?
김 - KBS 개그맨 제가 2기고, 1기가 심형래씨 인데 1기 뽑고, 일 년 쉬고 그 다음에 저희를 2기로 뽑았으니까 굉장한 원로라고 할 수 있죠.
이 - 당시에 같은 동료 분들이 혹시 누가 있었죠?
김 - 이봉원 씨, 김한국 씨, 임미숙, 이경애. 뭐 이런 분들...
이 - 당시 굉장히 젊으셨죠? 그 동기들 가운데서도?
김 - 아니, 우리는 다 열아홉 살이었어요. 열 아홉, 스물, 대학교 갓 졸업한 풋풋한 나이였는데 김한국 씨만 대학교 다니다가 복학한 복학생이었죠. 그래서 김한국 씨가 저희의 반장이었어요. 2기 반장. 근데 김한국 씨가 그때 당시 복학생이니까 얼마나 사회생활을 많이 해봤겠습니까? 군대까지 갔다 온 분인데. 근데 열 아홉 살, 스무 살 요런 비리비리 한 애들이 뭐 아이디어라고 가져와서 서로 네가 웃기니 내가 웃기니 싸우고, 더 나아가 자기가 더 웃긴다고 덤벼들고 그러니 얼마나 가소로웠겠어요? 근데 그걸 꾹 참고 반장을 해냈다는 거. 그게 지금 생각하면 매우 미안해요. 그때는 뭣 모르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고 그냥 덤벼 든거지.
이 - 결국은 김한국 씨랑 콤비를 했잖아요.
김 - 예 콤비를 했죠. 근데 김한국 씨랑은 잘 안 맞았어요. 지금도 성격이 잘 안 맞아요.
이 - 안 맞았어요? 그렇게 대박이 났는데?
김 - 네. 대박이 났어도, 하여튼 연기로써 욕심이 있는 사람들끼리 뭉친거지, 성격적으로 서로 좋아하거나 그런건 아니에요. 보세요. 누나 그냥 보면 예쁘죠? 예쁜데... 김한국 씨가 저한테 뭐 호기심을 갖거나 뭐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
이 - 당시 김한국 씨는 잘생긴 코미디언으로 정평이 나있었지요.
김 - 저 스스로도 김한국 씨가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또, 김한국 씨가 몸뚱이가 좋아요. 그래가지고 개그맨중에 소문났어요. 정력 세기로... (웃음) 그런데 그런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한테 매력을 내가 느끼질 않았고요. 김한국 씨도 “아휴~ 김미화? 하하!” 거리고 서로 막 으악! 이러면서 다녔었기 때문에 다른 건 없고 오빠로서 제가 좋아했던거지.
이 - 그때 오해도 많이 받았죠. 진짜 부부라고.
김 - 부부로 오해 많이 받았죠. 오해라기보다는 많은 분들이 돈을 잃으셨지. 왜냐면. 내기를 많이 하셨거든. 개그맨실에 전화해서 “김한국 씨하고 김미화 씨하고 제가 부부라고 그랬는데 부붑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악! 돈 잃었네.” 그러고 끊고 그랬었어요.
이 - 열아홉 살에 데뷔하셨다고 하는데 고등학교 졸업하시고 바로 시험을 치신 거예요?
김 - 졸업하기 전에도 매우 많이 시험을 봤었구요. 졸업하는 해에는 MBC, 그 전에 졸업하는 해에 취직을 했었어요. 저는 상업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관광 회사가 예전엔 북창동에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창동의 그 대로변에 관광 회사들이 쫙 있었는데 그 중에 한 회사에 취직을 했죠.
이 - 경리?
김 - 네. 무궁화 관광이라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회사의 경리사원으로 취직을 했었죠. 왜냐면 친정 엄마가 너무 걱정을 했었던 거예요. 제가 개그맨 시험을 많이보고 돌아 다녔었거든요. 교복을 입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여자는 그저 취업해서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서 살림하고 사는게 행복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근데 당시에 개그맨이 되고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었으니까.
이 - 그게 꿈이었나 보네요.
김 - 네, 그래서 교복입고 많이 시험보고 떨어지고. “교복 벗고 와라” 그래서 제가 교복 벗자마자, 시험이 딱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뭐 바로 연결이 안되는 거니까 그 사이에 경리사원으로 들어 간 거죠. 들어가서, MBC를 시험 봤어요. 몇 개월 만에 MBC에 붙은거예요. 그런데 뽑기만 하고 돈도 안줘, 어디에 쓰임도 없어, 그러던 차에 그만둔 회사 사장님이 찾아와서 “미스 김, 내가 보름치 월급을 한 달 치로 쳐서 줄 테니까 다시 와서 경리 사원을 하는게 어때?” 이래서 그때는 돈도 안 벌리고 하니까 이게 내 길이 아닌가보다 싶어서 포기를 하고 다시 회사를 들어갔어요. 회사 들어가서 몇 개월 하다가 KBS 시험이 있었던 거예요. MBC에 나랑 같이 시험 보았던 사람이 KBS에 원서를 넣고 시험보기 하루 전 날 절 찾아 왔어요. 전 그때 원서도 안 넣었는데 찾아와서는 “내일 내가 여기 시험을 보는데 김미화 씨 재능을 이렇게 썩히는건 너무 아깝지 않느냐 그러니 나랑 같이 콤비로 나갈래?”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 이것도 운명인가?” 그래서 간 거예요. 은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KBS 2기로서 개그맨 생활이 시작이 된거죠. 그래서 회사에도 미안하지만 어찌됐건 육 개월 만에 정리를 하고 개그맨 생활로 접어들게 된거죠.
이 - 고등학교 때 부터 개그맨 시험을 몇번 응시하려고 그랬던 것은 학교 다닐 때 재미있는 사람으로 이미 알려졌기 때문일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수학여행이나 소풍가서 애들을 웃겨주고 그러면 애들이 “야 너 재밌다” 이렇게 해서 나한테 개그적 감각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김 - 그럼요.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김미화가 안가면 안될 정도로 그 다음에 응원 단장도 했었고. 뭐 여러가지로 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제가 빠지면 정말 재미가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개그맨 된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아무나 되는건 아니고요. 정말 그런데서 갈고닦은 실력, 정말 전교생이 있는 자리에서 뭔가 응원도 해보고 웅변도 해보고, 오락부장도 하고... 이런 담력을 꾸준히 쌓아왔던 사람. 이런 사람이 되더라고요.
이 - 나이 마흔에 다시학업에 도전하셨는데 계속 개그맨으로 정점에 있었는데 왜 뒤늦게 “공부를 해야겠다.” 라고 생각을 하신 거예요?
김 - 뒤늦게 “공부를 꼭 해야 되겠다.”고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마흔 살 무렵입니다만 사실은 개그맨 되고나서 얼마 안가서 “아! 이게 공부를 좀 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저질시비에 코미디가 많이 휘말렸었거든요. 그 당시 팔십 년대 중반에… 저질시비에 휘말리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어떤 의욕만 가지고 코미디언이 돼야 되겠다. 나는 웃기는 사람이야! 외모도 웃겨, 심지어는 내가 웃기는 재능도 있어. 그래서 그런 재능 하나만 믿고 아무런 기법도 모르고 그냥 뛰어든 것이다. 이게 혹시 내가 저질시비에 일조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좀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좀 해야 되겠다. 방송이라든지 어떤 언론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이 - 아, 지금 한 참 녹음을 하고 있는중에 시끄러워 가지고 잠시 인터뷰를 중단 해야 되겠습니다.
김 - 저게 군대 비행긴데 지금 반짝 반짝 하면서 우리를 찍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이 작가랑 뭉치지 말아야 한다는……. (웃음)
이 - 사찰입니다. 사찰. 하! 하! 하!
김 - (이작가가) 현대사를 맹비난 하고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작가랑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분들이 내려와서 저를 인터뷰하면 항상 요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비행기가 안 날아 가다가 꼭 이런 날 날고, 꼭 불이 반작 반짝 해요. 진짜로 그래요. 지난번에 한겨레 하니TV에서 나와서 인터뷰 할 때도 몇 차례 이렇게 나타나서 방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웃음) 네네. 우리가 온지 어떻게 알고. (웃음)
이 - 도청을 하나 봅니다. 이제 얘기 하시죠.
김 - 그래서 대학을 다니게 된거죠. 중앙대학에서 석. 박사 하시는 분들이랑 같이 뭉쳐서 연구과정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그 연구과정을 3 년 동안 하게 됐습니다. 신문방송, 연극영화. 이런 쪽의 공부를 좀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법이라는 게 아! 이렇구나. 방송에서 뉴스는 왜 그 시간에 꼭 해야 되지? 우리가 그렇게 규정지었던 것을 바꿔서 여덟 시에는 안 될까? 또는 방송도 틈새시장이 있는거고, 광고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 되는거고. 또 연극계에 요소와 기법들, 희극은 왜 희극이고 비극은 왜 그렇게 되는건지에 대한 심화 과정을 거쳤죠. 그래서 저에게는 무슨 학위를 따거나 학교를 졸업하거나 뭐 그래서 내가 꼭 대학을 나왔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게 아니었어요. 그냥 스스로 아, 나는 이런 공부를 해보고 싶네. 라고 생각 될 때. 그때 공부를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한 경험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규정 지어진대로 꼭 살 필요는 없다. 1 다음에 2 고 2 다음에 3 이고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 안가도 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대학 안가도 된다. 다만, 이건 내가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가는게 아니고 공부를 정말 하고 싶어서 안가야 되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이것보다는 다른 거에 미치는 게 있어. 그러면 거기에 미쳐 보는거야. 쭉 미쳐보면 내가 나중에 필요로 해서 공부를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NGO 단체 분들과, 어려운 분들을 위해 봉사활동 하는것을 너무 좋아 하거든요. 가서보면 제가 행복해요. 오히려 그 분들을 통해서 제가 배워요. 언제 우리가 근육병 환자들이나 아니면 정말 장애를 많이 가진 분들이나 버림받은 어린이들이 모여있는 곳이나 정말 나이 드신 외로운 노인들이 있는 곳에 가볼 기회가 많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분들이 우리한테 기회를 주는 거거든요. 가서 보면 정말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수가 있고, 내가 눈으로 보면서 “아! 그래 내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겠어, 내가 더 따뜻해질 필요가 있겠어.” 하는 것들을 알게되요. 느끼게 되고...
이 - 이렇게 봉사활동도 많이 하시는데, 자신의 생활이 어려운 것을 빌미삼아 협박하시는 분들도 계시다고요? “몇 백을 달라. 혹은 몇 천을 달라.” 하면서 통장번호 보내고 또, “당신 아이들 내가 어느 학교 다니는 줄 알고 있어.” 이렇게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다면서요?
김 - 굉장히 많이들 요구를 해요. “내가 어려우니까 돈을 꿔 달라.” 근데 그런 것들을 거를 수 있는 장치도 없거니와 그 분들 중 진짜 어려운 분들도 계시겠지만 진짜 협박성으로 그게 무기인 사람들까지 내가 도와줄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도움을 줄때 과연 어떤게 좋은 방법이냐? 이런 분들 진짜, 협박하는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이 하도 여러 곳에서 안도와 주니까 그렇게 얘길 하는건데, 그랬을 때 결과적으로 이 분들을 나쁘다고 매도하지 말고 저분들을 사회 안전망 안으로 끌어 들이면서 그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정말 사회에 기여도 하고, 자기 스스로 자존감도 찾고, 그럴 수 있는 기법같은 것을 배우면 굉장히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된거죠.
이 - 과거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을 보고싶어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아까 김한국 씨 이야기도 하셨습니다만 요즘에 신동엽씨가 야한 농담의 일인자, 야한 코미디의 일인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사실 김한국씨도 그런 거 잘하거든요. 그런 19금 코미디를 TV에서 한번 보고 싶기도 한데 우린 너무 그런것에 대해서 다른 나라보다 제약이 심하지 않은가 생각도 드는데요.
김 - 터부시 하죠. 그런 성(性)이나 아니면 뭐, 하여튼 그런 얘기들을 사회에서 그렇게 규정지은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런것을 공중파에서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도 합니다. 신동엽 씨 이야기 했습니다만 그것 역시도 케이블 아니에요? 또 인터넷도 있잖아요? 이 작가가 하는 이이제이도 욕하면서 방송하잖아요. 그런것들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성역이 없어야 되는건 맞아요. 무엇이든 다 다룰수 있어야 해요. 근데 뭐 심지어 정치조차도 코미디 안에서 다루지 못하는데 무엇을 다룰 수 있겠어요? 그런 면에서 신동엽 씨나 우리가 터부시 하는것을 가지고 방송을 만드는 제작자들. 그런 팀에 속해있는 분들은 대단한거예요.
이 - 코미디를 하시다가 갑자기 시사 방송진행자로 등장을 하셨는데, MBC 측에 요구가 있었던 겁니까?
김 - 예. 갑자기 시사프로가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기싫어 도망다녔는데 하게 되었어요. 대중 연예인이 정치적으로 반대에 있는 사람들한테 욕을 먹을 필요가 없거든요. 그랬는데, 거 봐! 제가 예상한대로 딱 맞아요. (웃음) 당시 피디가 말이에요. 그렇게 그냥 “김미화, 꼭 해야 된다. 사회 복지를 넓게 하는거다. 김미화 씨의 목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런 꼬임에 빠져서, 물론 제가 선택한 겁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정말 행복하게 십 년 동안 했습니다.
이 - 처음에 혹시 부담감은 없었나요? 하기싫다 이런 거 말고, “아니 김미화, 코미디언이 뭘 안다고 시사 프로그램을 해?” 이런 종류...
김 - 그런 저런 부담감은 많이 있었죠. 꽤 컸어요. 그러니까 시사(時事)라는게 주는 중압감이 일단 무섭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그런 말들도 굉장히 많았죠. “야! 코미디언한테 어떻게 그런 정통 시사프로그램을 맡기냐? 이 프로가 웃기는 거냐?” 피디도 비난받고 저도 비난받고 저 스스로도 많이 떨고 그랬었는데 하다 보니까 “아, 이런 바른 목소리를 모르는 입장에서 저도 모르고, 듣는 분들도 모르니까, 물론 아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그것을 되짚어서 이것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고, 또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를 함께 편안하게 고민해 볼 필요는 있겠다.” 왜냐면 경제라든지 사회가 돌아가는 현상이라든지 정치 돌아가는 현상, 그런것을 겉모습만 봤을 때하고 그 안에 서 이 당과 저 당은 이러이러한 각자의 입장에서 또는 이 회사와 저 회사는 각자 이런 입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이렇게 포장을 해야지만 되는구나! 를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다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제가 그냥 편안한 아줌마의 입장에서 일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그런 비난이 올 수 있다, 라는 것을 알고 피해 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이렇게 저한테 온거죠. 그렇다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된다. 라는 생각으로 즐긴 거예요. 저는 십 년 동안 꽤 잘 즐겼고요. 그만 두면서 내가 좋은 코미디를 할 수 있겠구나. 이건 어느 코미디언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것을 내가 한 거구나 라는 생각했었는데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직 실현을 못 시키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진정한 시사 코미디, 시사 토크쇼는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 - 해보고 싶으세요?
김 - 뭐 제대로 기회가 되면 해 보고 싶죠. 재밌게 할 수 있습니다.
이 - 하실 때 저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제대로 컨트롤 해드리겠습니다. 하! 하! 편파 방송을 표방하는 팟 캐스트 <나는 꼽사리다>와는 달리 공중파에서 시사방송 하실때는 중립적으로 하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하실 수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좌파 시비가 일어가지고 그만두게 되셨는지요?
김 - 모르겠어요. MBC의 노조가 굉장히 세고, 피디 노조나, 안에있는 노조가 강성이다 뭐 이런 여러가지 현상들을 보면서 반대쪽에 있는 분들이 “MBC에서 방송을 하는것은 곧 좌파를 돕는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시사프로 안에서 포장하는것도 못 마땅했었고, 또 공격할 빌미가 사실 저는 앞에 나와있는 사람이고 제작진이나 이런 분들은 뒤에서 저를 서포터 해주고 대본 만들어 어느 방향으로 가자하는 사람들 이니까, 뒤에 있는 분들은 안 보이고 제가 보이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누구겠어요, 저죠. 그래서 뭐... 좌파라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 하시는 거고. 저는 부끄러움 없이 정말 뭐 시대의 소리? 이런 것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잘 들려줬다라고 생각을 하구요. 그런 면에서 지금 바른 언론사들이 몇몇 없는 것 같습니다만, 바른 소리를 내려고 하는 분들 또는, 그런 언론사들을 좀 많이 응원해주시고 칭찬해주시고 이런게 많이 필요 할 거 같아요. 저도 얼마나 저에 대해서 좌파라고 생각을 했었고 얼마나 많은 공격을 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힘으로 저를 응원하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우리 사회에 저를 매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런 분들조차도 포용해야죠. 그런 분들의 생각은 그분 나름대로 하고, 자기 생각이 있으니까 비난하거나 어떻게 또 바꿔라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이 분들조차도 제가 사랑하는 인생을 보고 끝까지 가서 거봐, 그렇잖아 하고 비난을 했으면 좋겠어요. 근데 지금은 겉에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런 이미지, 거짓된 이미지 이런것을 가지고 손가락질을 하는거죠. 그건 잘못된거죠. 왜냐면 저를 다 알지 못하잖아요. 제가 그 분들을 모르듯이... 그러니까 겉에 현상만 보고 비난할것은 아니다. 또 제가 비난받을 일을 한 것도 없어요.
이 - 지금 부당한 공격을 받는것 같은데, 변희재 씨나 정미홍씨나 트위터 상에 친노, 좌빨 김미화 어쩌고저쩌고 해가지고 법정까지 가셨잖아요.
김 - 부당하게 그렇게 공격하면 우리나라 법이 있는 거 아닙니까? 법에서 승리를 할 거 아니에요. 천 삼백 만원 일단 확보했고. 또 점점 더 액수가 커질겁니다.
이 - 그러니까 이재명 시장도 우리하고 인터뷰를 하겠지만 이재명 시장이 늘 이야기 했거든요. 자꾸 용서 해주면 또 그런다. 그래서 이번에 김미화씨 이재명씨 계속 그렇게 법원에서 벌금받고 그러니까 변희재 씨가 안 하던 사과까지 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 - 하여튼 사실이 아닌걸 가지고 사실인 것처럼 허위로 그렇게 저를 극렬하게 공격해서 퍼트리는 거죠. 그런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제가 딱 시사프로를 시작하면서 공격이 되었으니까 이건 뭐 굉장히 오래된 싸움이에요. 표면으로 나타난건 얼마 안됐지만 오래된 싸움을 했었죠.
이 - 문성근 씨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TV에 나가고 싶어도 안 불러준다.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못 간다.” 명계남씨도 그랬고. 혹시 김미화씨에게도 그런 일 없었습니까?
김 - 그런 분위기를 타는것도 있겠죠. 근데 지금은 또 안 그래요.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래서 고정으로 뭘 하자라는 오퍼는 없는데 그래도 예능 프로그램이나 여타 프로그램에서 프로그램 좀 해달라고 얘기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또 뭐, 안 불러주면 어때요? 요즘 언론이 그거 하납니까? 여기저기 막 이이제이도 이작가도 오셔가지고 인터뷰하잖아요? 또 다른데 여러 곳에서 잊지 않고 저를 찾아주고 이런 시기는 이렇게 지나가고, 굳이 안달복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 “나는 꼽사리다” 꽤 오래 하셨어요? 그렇죠? 대선 전부터 해서?
김 - 네. 이 년 정도 했네요.
이 - 돈 안 되잖아요. 그거 출연료도 없고
김 - 출연료도 없고 차비도 들고 기름 값도 제가 들이고 하는거죠.
이 - 그러면서도 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김 - 젊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제가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정치는 제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경제의 꼼수들? 그런 것들은 저도 배워가는 거고. 진짜 바른 소리내는 경제 학자들이 바른 이야기를 해 준다면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이 거기서 용기를 얻을 수 있고 너무 거짓된 정보들이 요즘 많이 있기때문에.. 부풀리는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빚도 많이 지게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빚을 갚게하거나 대책을 세울 수 있게 하는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나락에 빠뜨리고 그러고 그 사람들이 나락에 빠뜨리면서 구제해 주지 않는 것. 그렇게 되니 젊은 사람들이 애를 안 낳겠다. 싱글로 살겠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사면초가 상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친구들에게 용기를 주 는 어떤 사람...
이동형 - (이 때 또 비행기가...) 중요한 이야기 할 때마다.
김미화 - 쟤는 또 멀리서 나네요.
이동형- 안 걸릴라고… (웃음)
김 - 이제 이 정도 나이가 되고나니까 우리 후배들한테도 제가 정말 좋은 무대를 만들어 주고 싶었듯이 젊은 친구들에게 좋은 세상의 정보를 또, 놀이터를 제공해 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우석훈도 그렇고, 선대인도 그렇고, 김용민도 그렇고, 다 그런 마음이죠. 선배로서 일단 후배한테 미안하다,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지고 있는 재능이 방송 진행하는 거 밖에 없다. 그래서 내 재능을 기부한다. 이런 느낌이 었어요.
이 - 젊은 사람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실 기성세대는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살만하다 그땐 그랬었거든요. 취업도 어렵지 않았고. 근데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도 안 되고. 일단 당장에 돈이 없으니까 연애, 결혼도 불가능 하고...
김 - 그리고 점점 직업도 비정규직, 계약직...
이 - 그렇죠. 좋은 직장 사라지고. 결혼 하려고해도 집이 있어야 되는데 집값은 자꾸 오르고 여러 가지 고충들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거 같은데. 우리 젊은 친구들한테 글쎄요, 희망과 용기? 그런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김 - 아니에요. 제가 뭐... 딱히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라든지 배려라는게 없기 때문에 그냥 좀 경제학자들 이야기 들으면 암울해요. 선띨이(선대인 경제 연구소 소장), 우띨이(우석훈 박사) 얘기 들으면 “야. 진짜 젊은 사람들 어떻게 살지?” 당장 젊은 사람들 이야기라지만 사실 내 딸, 아들 얘기거든요. 이 친구들 어떻게 살지? 그런 생각을 해요. 근데 그나마 어떤 경제 현상들을 진단하고 이런 거에서 어떤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들을 한다면 그것이 나중에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합니다. 왜 우리가 앉아서 술 먹고 뒷 담화하고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들이 있잖아요? 근데 그런 거 말고 정말, 정말 앉아서 허심탄회하게 “야 진짜 젊은 애들이 시집 장가를 안 가는데 왜 그래? 솔로 현상이 나타나는 거 뭐야? 일본은 어땠어? 그러면 뭐 일본도 거품이 붕괴되고 다시 도심으로 와서 혼자 사는 주택들이 늘었다는데 그런건 어떻게 해결해야 돼?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결혼 안 하고 혼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결혼도 못 하는 사람들도 있다잖아. 어쩌면 좋아?” 이런 것들을 정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면서 이 친구들이 진단해주면 아 이렇구나. 이게 사회적으로는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가야 될 방향이겠구나 하는 것을 조금은 생각 있는 사람들이 듣거나 정책에 좀 반영을 해주거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하는거죠.
이 - 지금 김미화 씨를 정치적 이념으로 나누는 사람들이 김미화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겉으로 보이는 걸로 김미화 씨를 진단해 버리거든요. 좌파주의자, 더 많이 나아가면 빨갱이,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 본적 있으세요? 진보주의자라든가, 혹은 중도주의자 라든가 본인의 이념에 대해서 생각 해 본적 있으세요?
김 - 그런 걸 제가 생각을 해보진 않았고요. 그냥 욱! 성질이 있어요. 주변에서 다 말려도 제가 깊이 생각해보고 “이것은 아니야, 어떤 사회적으로 이런것을 자꾸 용인하거나 귀찮고 에이, 피곤한 일이니까 피해버려야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죠. 사실 피곤한 일 이거든요. 근데 그것이 아니야, 라고 생각 할 때 제가 그냥 실천하는 거예요. 사실 여기 논밭 한가운데 우리 친환경 하시는 분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카페를 만들었을 때 여기 유동인구도 없고 교통량도 많지 않아요. 이거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저희 부부는 여기에 정말 돈도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랬을때 사회적으로 내가 뭔가를 해야 할 때, 개인적으로 뭔가를 해야 될 때 결단을 내리는 용기. 그런 게 있는 거지. 그런 거지. 실천하는 거지. 어떤 제가 이념적으로 편향이 됐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사실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이념적으로 더 편향되어 있는거 아닙니까? 자기 색깔로 재단해 버리거나 저 사람은 저랬으면 좋겠어. 라는 마음을 갖고 그냥 공격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에 괘념치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없는 말들을 만들어서 공격하면 더 좋아요. 법이 있잖아.
이 - 욱! 하는 성질이 있다고 하는데 그 “욱! 성질” 때문에 CBS도 그만 두신 겁니까? 그때 피디들이 다 말렸다고 그러던데?
김 - 아니, 아니에요. 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십 년 동안만 하겠다.” 라고 해서 그만둔 거예요. 저는 제 인생은 제가 재단을 해요. 그러니까 저는 “제 인생은 제가 주인공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하구요. 인생이 귀한 거잖아요. 하루하루 사는 것을 허투루 살면 안되는 거잖아요. 십 년 동안 시사프로를 해야 되겠다고 정해놓은 저만의 법칙이에요. 그래서 십 년 동안 시사 프로를 했고 그래서 그 이후에는 관두고 뭔가 다른 새로운 것을 해보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거는 좋은 거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제가 CBS 개편에 맞춰서, 그때 4월이 개편이었거든요. 그래서 미리, 그 전에 미리 피디들하고 얘기를 해서 개편 때 맞춰서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했던 거고. 그게 변희재씨 때문에 한 달 정도 빨리 내려온 거죠. 그때 논문 시비를 했습니다마는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판단을 내리기까지 기다리면서 방송을 계속할 수는 없잖아요. 변희재씨 때문에 왜 제가 정해 놓은 법칙에 대해 어긋나야 하는 겁니까? 그때 안 내려오면 그냥 끌려가서 또 오랫동안 시사프로그램 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러면 또 기회를 놓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때 결정을 하고 내려 온 거죠.
이 -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인생을 백년으로 봤을 때, 지금 반 이상 사셨고.
김 - 반 이상 산 거 아니에요. (웃음)
이 - 하! 하! 여러분. 반 이상 아니랍니다. 지금까지 사셨던 거보면 코미디언으로서 시사프로 그램 디제이로서 좋아하는 카페 호미의 주인, 사장님으로서 지금 안고있는 강아지의 주인으로서 사셨는데,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사시고 싶으세요?
김 - 남은 인생은요? 그러게? 지금처럼? 좋잖아요. 어떻게 살고싶다 그것은 우리가 정해놓는 거구요. 정해 놓은대로 인생이 안 간다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남은 인생 그렇게 사는 거예요. 내일 또 무슨 일 닥치면 거기에 당차게 대응하는 거구요. 즐겁게 사는거죠. 왜? 내 인생을 위해서…….
이 - 오늘 김미화씨 인터뷰 한 시간 반 정도 들으셨는데요. 제가 느끼기엔 그런 거 같습니다. “자기 인생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면 좋을 거 같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