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헉헉...
다른 사람은 어쩌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쫓아오면 나는, 뛴다. 이유 같은 거 안 따진다.
‘쫓아올 만하니까 쫓아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달리면 마음이 편하다. 대개는.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 마주칠 때마다 매번 저런 식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이 상할 거다.
지금 내 뒤에서 주둥이에 거품을 물고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는 저 똥개 새끼 말이다.
나는 잘못 없다. 아무 짓도 안 했다. 건드리지도 않았고, 위협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눈도 맞추지 않았다.
정말이다.
헉헉...
다행히 나는 이 동네 지리에 빠삭하다. 이 좁다란 골목이 어디로 연결되고 또 그 길은 어디에서 나뉘고 어디에서
끊어지는지 발바닥에 다 입력돼 있다. 뭐, 토박이니까. 급하다고 조 앞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다간 게임 셋,
막다른 골목이다. 저기 보이는 구멍가게를 지나 전봇대를 끼고돌면 안심해도 된다.
이런... 저놈도 알고 속도를 높였다. 뭐 저놈도 거의 토박이니까. 자, 전력질주다. 저기 죽 이어져 있는 연립주택
중에 대문이 열린 아무 집에나 들어가면... 젠장, 문들이 죄다 잠겨 있다. 동네 인심 참 더럽게 훈훈해졌다.
헉헉...
너무 무리했다. 도저히 더는 못 가겠다. 저 계단참에 널브러지지 않으면 몇 발짝 더 가서 저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겠지.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여기서 몇 입 물려주는 게 더 효율적이... 어라?
똥개 녀석도 멈췄다. 저놈 나보다 더 지쳤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저놈을 안다.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다. 이름은 없다. 저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다.
내가 정한 이름은 똥개다. 저놈 입장에서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형편없이 여위고 털도 듬성듬성
빠져 볼품없게 변했지만 한창땐 제법 근사한 놈이었으니까. 저보다 훨씬 못해 보이는 놈들도 잘들 주인을
만났는데 똥개 저놈은 팔자가 사나운지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알고 보면 똥개 저놈, 꽤나 영리하다. 꼬리를 언제 흔들고, 언제 감추어야 하는지 징글맞게 잘 안다. 주인과
함께 산책 나온 치와와가 깡깡대도 낑낑거리면서 꼬리를 감추고, 대여섯 살 꼬맹이가 으르는 시늉만 해도
비루한 눈빛으로 뒷걸음질 친다.
딱 하나의 예외가 바로 나다. 똥개에게 나는 치와와만도 못한 존재다. 내 냄새만 맡았다 하면 저렇게 죽자고
달려든다.
나와 똥개의 관계가 처음부터 숨 가쁜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나도 놈에게 존중받았다. 치와와나 꼬맹이들만큼?
그 정도면 내가 말도 안 꺼냈다. 똥개한테 족발 뼈다귀라도 챙겨주는 사람은 이 동네에서 나밖에 없었다.
해코지하는 아이들에게 살살하라고, 적당한 선에서라도 막아준 사람 또한 나밖에 없었다. 내가 동네 어귀에
나타나면 녀석은 마치 경호라도 하듯,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멀찍이서 졸졸 쫓아오는 것으로 충성심을
드러내 보이곤 했었다. 정말이다. 정말 그랬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똥개 자식, 슬슬 몸을 일으킨다. 게다가 옛정 따위에 사로잡힌 얼굴이 아니다. 자, 또 뛰자.
헉헉...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똥개가 돌변한 건 그 일이 벌어진 직후였다.
그 일을 겪고 한동안 집에서 칩거하다가 나왔더니 녀석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그땐
따뜻한 품이 몹시 그리웠다. 무지무지 추웠고 누구의 온기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팔을 벌리고 녀석이 품속으로
파고 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가만 보니 똥개 자식, 꼬리를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고 거품을 물고 있는 게
아닌가? 꼭 지금처럼 말이다. 나는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도 꼭 지금처럼 생각했다.
‘내가 투명인간이 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다. 정말이다.’
헉헉...
안 되겠다. 그 얘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저놈부터 따돌려야겠다. 똥개를 달고 숨을 헐떡이면서 늘어놓을 만한
얘기는 아니니까. 듣는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꽤나 비장한 얘기다. 그렇다고 손수건이나
티슈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당신은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아, 저기가 좋겠다. 길 건너 미용실 옆에 있는 작고 낡은 카페 <몽> 말이다. 썩 쾌적한 환경은 아니지만
그 얘기를 하기엔 저만한 공간도 없다.
예상대로다. 홀은 텅 비었고 술 좋아하는 사장은 카운터 뒤에 푹 퍼져 있다. 뭐 아직 시간이 시간이니까.
그나저나 똥개 자식 되게 아쉬운 모양이다. 혀를 길게 내밀고 헐떡이면서 창밖에서 서성대고 있다.
환할 때 여기 온 건 정말 오랜만이다. 수이가 아르바이트할 때는 낮이고 밤이고 들락날락했는데...
아, 수이는 내 옛날 여자 친구다. 그녀는 무지무지 귀엽고 무지무지 착했다. 무지무지 똑똑했고
무지무지 현명했고 그러면서도 나한테 무지무지 잘했다.
게다가... 그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다. 수이 얘기를 하려고 여기 들어온 건 아니니까.
이제 숨도 골랐으니 얘기를 시작해야지.
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졌다. 예고도 어떤 징후도 없었다. 게다가 타이밍이 절묘했다. 만약
그 일을 겪지 않고 남들처럼 평범한 노년을 맞이한다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아아 그건 내 인생이 새롭게 출발하는 찬란한 한때였지.” 라고 회고할 만한
꼭 그런 순간이었다.
#2
어떤 기억들은 심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생각이 그 기억의 언저리에만 닿으면 자동적으로
온몸이 쿵쿵 요동치는 걸 보면 말이다. 지금이 꼭 그렇다. 그때의 내 입장이 되면 누구라도
그럴 거다. 그러니까 당신이 연극배우인데 7 년만에 처음으로 주인공이 된다면...
아, 어쩌면 당신은 나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겨울 딸기밭에는 포도가 없다>라는 영화를
아시는지? 내 영화 데뷔작이다. 그 영화의 주제부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엉엉 울면서 포도를
먹는 장면에서, 주인공에게 냉동 딸기를 권하는 뒷모습의 남자가 바로 나다. 인터넷에 아직
떠돌고 있을 수도 있으니 궁금하다면 한 번 찾아보시기를.
처음부터 배우가 되려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연극의 ‘연’자와 연애의 ‘연’자가
같은지 다른지도 몰랐으니까. 뭐 지금도 한문으로 쓰라면 헤헤, 하고 얼버무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대학 신입생이었던 어느 봄날, 지긋지긋하게 울긋불긋한 꽃들을 피해 학교에서 제일 후미진
벤치에서 소주를 홀짝거린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술이 알딸딸하게 오르던 참인데 이미
얼굴이 불콰해진 과 선배가 나타났다. 채 인사도 건네기 전인데 선배가 술병을 낚아채며
이죽거렸다.
“이런 지랄 맞은 날, 이런 지랄 맞은 데서 궁상떠는 거 보니 너두 참 알쪼다.”
1970년대의 어느 하늘에서 불시착한 것 같은 인상의 그 선배는 목을 90도로 꺾어 한참을
꿀꺽꿀꺽 병나발을 불더니 대략 0.1mm가량의 소주를 비워내곤 내게 병을 도로 넘겼다.
선배의 낯빛은 붉다 못해 검어졌다. 캬... 선배가 가방에서 너덜너덜한 종이뭉치를 꺼내
툭 던졌다.
“읽어 봐라.”
겉을 일부러 너덜너덜하게 만든 연극대본이었다. 안쪽은 눈이 부시도록 하얬다. 읽어보라고
다시 권하는 선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읽고 쓰기를 뗀 지도 어언 십수 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읽을 대사라곤,
그럼, 당연하지!!
그렇구 말구...
딱 그 두 줄이었으니까.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나랑 연극하자.”
“왜요?”
잠시 머뭇대던 선배가 대답했다.
“그렇게나마 읽어준 거, 니가 처음이거든.”
언제나 후회하며 살았지만 그렇게 온몸으로 후회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공연 날이
점점 다가오자 온몸이 배배 꼬이고 온 뼈마디가 다 쑤셨다. 관객을 떠올리면 속이
느글거리고 먹는 것마다 얹혔다. 하루에 두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교통사고가 나면 좋은데... 심하게 다치지는 말고 다리만 부러졌으면...’
책상 위에 팽개쳐둔 초대장을 발견한 어머니가 내 등짝에 시퍼런 손자국을 남기며 말했다.
“등신들 노는데 짝 모자랄까 봐, 패 채우러 들어갔냐?”
나는 등신들 패 채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항변하려다 참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게 내
인생 마지막 무대일 테니까.
하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 조명 아래 서자 희한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서 관객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문득 유체이탈이라도 된 것처럼 극장 전체의 모습이
조망됐다. 극장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무대와 객석.
보란 듯이 나서는 쪽과 숨죽이고 지켜보는 쪽.
밝음과 어둠.
그러고 보니 내가 밝은 쪽에 있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 속에 숨어 있던 배우본능이 그 순간에 깨어났던 것일까? 나는 내 역할에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연습할 때는 하찮게 느껴졌던 역할이 거대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나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럼... 당연하지........
그렇구....................................
말구...................................................................
나는 졸업을 하자마자 대학로에 뛰어들었다. 대학로 생활이 어땠는지, 뭘 하고 지냈고,
뭘 먹고 살았는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세상에 연극말고 다른 일이
있다는 건 생각도 안 났다.
“무대에서 말을 잘하네. 걷기도 잘 걷고.”
대학로에서 3년을 보내자 나랑 공연한 괜찮은 연출들이 그렇게들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제법 쓸 만한 배우라는 뜻이었다. 이런저런 출연제의가 쉴 틈도 없이 들어왔다. 그 외
다수 역으로 출발해서 이런저런 단역,멀티 역을 거쳐 비중 있는 조역으로 자리 잡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또래 배우 중에서는 내가 제일 잘 나갔다.
내 생각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이는 거기에 적극 동조했다.
어느 날 공연을 끝내고 분장을 지우려는데 조연출이 노란 장미 한 송이를 전해줬다. 방금
극장에서 나간 예쁘장한 여자분이 맡겼다는 것이었다. 고맙고 궁금해서 얼른 쫓아갔더니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누굴 주려고 산 건 아닌데... 드리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요.”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려주려고 함께 달려온 조연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예쁘장’의
기준이 뭐냐? 조연출이 속삭였다. 내가 잘못 봤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 앞뒤 없이 첨벙, 다이빙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끌렸다. 그녀가 가진 분위기가,
그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좋았다.
수이는 보면 볼수록 예뻐지는 친구였다. 그녀는 한때 배우 지망생이었다. 똘똘해서 배우도
곧잘 했을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무대공포가 심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엔 엄마같고 누나
같고 때론 딸 같은 친구가 공연 때만 되면 선생님으로 돌변했다.
“오빠, 공연할 때만이라도 제발 담배 좀 끊어라.”
“오빠, 대사 칠 때 그 특유의 쪼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오빠 호레이쇼는 옛날에 지나갔거든? 빨리 쫓아 보내.”
내가 좋은 소리도 좀 듣자고 투덜대면 수이는 정색을 했다.
“오빠, 한때 가능성이 있었었었었던 배우로, 배우인생 종 칠래?”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그 앙칼진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듣고 싶어도 들을수가 없었다.
줄줄이 이어지던 출연 제의가 갑자기 뚝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현실에도 영화나 드라마처럼
효과음이 삽입된다면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뚝. 쉬는 것도 나쁘지 않네, 처음엔
배를 두드렸지만 그 생활이 반년을 넘어가자 머릿속이 휑해졌다.
그 까닭을 깨닫게 된 건 또래 배우들과의 술자리에서였다. 우연히 내가 출연했던 <햄릿>이
안주로 올랐는데 아무도 내가 호레이쇼였던 걸 기억하지 못했다. 그걸 본 사람이 그 자리에
셋이나 있었고 그중에 둘은 뒤풀이까지 같이 했는데도 말이다. “정말? 정말 생각 안 나?”
다그치고 싶었지만 꼴만 우스워질 같아서, “뭐 그럴 수도 있지!” 경직되다 못해 쥐가 난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분위기만 썰렁해졌다.
별일 아니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고, 나 역시 그랬다. 다만 거기서
끝낼 얘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주는 보이지도 않고 자꾸 소주잔에만 손이 갔다. 그러다 나
도 모르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베르쉬닌이었던 것도 생각 안 나겠네? 나 뜨리고란도 했거든? 밤으로의 긴 여로에 나왔을
땐 어땠어?”
세상에 그렇게나 정직한 인간들이 또 있을까? 공연을 봤다는 놈들이 한다는 소리가 하나같이
“그랬어? 너 거기 나왔었어?”였다. 따지고 들어봐야 입만 아픈 얘기지만 나는 굳이 따지고 들었다.
치사해서 그런거까지 들춰내진 않았지만, 지들 빌빌댈 때 술 고프다면 술 사주고 배고프다면
족발집으로 끌고 다닌 게 누군데?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베르쉬닌, 뜨리고란, 에드먼드
티론 역을 하면서 한 달 공연료랍시고 받은 10만 원, 20만 원을 쪼개 그 짓을 했다는 게 못내
억울하고 분했던 거였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바란 건 솔직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 중에 단 한 놈이라도 “그럼 기억나지.”
그 한 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누가 엄지손가락 치켜세워주진 못하더라도
“그때 너 쫌 그랬어.”라고 눙쳐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평생 그렇게 정직하게 살아라, 이 자식들아,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이지 입만 아픈
얘기였다. 2차 가자는 손길을 뿌리치고 허위허위 걷는데 일기예보에 없던 눈송이 몇 개가
툭툭 떨어졌다. 첫눈이었다. 문득 수이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전화를 걸어 눈이 온다고 하자
수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여긴 안 와.”
첫눈답지 않게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탐스럽고 예쁘던지,
비보잉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보를 잘 좀 하든가. 예보를 잘 좀 지키든가.
이게 나라냐? 이건 뭐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어. 에이 개 같다, 진짜.
얼마 후,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얼굴도 안 보여주던 수이가 급하게 찾았다. 카페 <몽>으로
달려갔더니 수이가 비교적 어벙하게 생긴 애송이를 소개했다. 수이의 이종사촌 오빠의
절친의 동생이 아는 후밴데- 수이는 그동안 손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을 찔러보고 다닌
모양이었다- 자신이 최근에 쓴 작품을 직접 연출해서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었다.
작품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괜찮았다. 허술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잘만 꾸리면
오픈 런으로 갈 수도 있는 작품이었다. 다만 연출과 이미 꾸려진 배우진의 경력이 너무
짧아서 주인공을 맡길 만한 배우를 영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공연 일정이
확정되던 날, 수이가 맥주잔을 높이 들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오빠가 누군지 확실하게 보여줘. 그럴 수 있지?”
#3
드디어 문제의 그 날이 왔다. 내가 주인공으로 데뷔하는 바로 그 날 말이다. 해는
동쪽에서 떴고 날씨는 맑았다. 낮 최고 기온 섭씨 24도. 바람은 초속 1미터. 습도 40%.
예비 관객들이 야외로 놀러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상관없었다. 공연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될 테니까.
작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연출도 보기와 달리 카리스마 넘쳤고 계산이
칼같이 정확했다. 극장으로 향하는데 나도 모르게 휘파람이 나왔다.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이 분주했다. 콩알 한 알이 달걀이
됐다가 소가 되고 말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조금 규모 있는 공연 두어 개를 성공적으로 치른 다음, TV로 진출해서 이름값을
조금 올리고, 그다음에는 충무로를 거쳐 할리우드로...
극장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몸을 풀고 있는데 문득 한 문장이 떠올랐다.
어허, 어허, 어허헛!
몇 번을 털어냈지만 그 문장은 당최 지워지질 않았다.
‘공연을 완벽하게 망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그때만큼 실감 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마침내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극장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호흡을 가다듬고 막 무대로 나가려는데 내 조수 역을 맡은 동건이가 박사님,
하고 불렀다. 돌아보자 녀석이 고개를 쭈욱 빼고 나를 유심히 살폈다.
“얼굴에 뭐 묻었냐?”
“죄송합니다. 첫 공연이라 제가 잠을 설쳤거든요. 분장실이 너무 어둡기도 하구...”
“분장실이 어두워서 뭐?”
“아닙니다. 박사님, 파이팅!”
공연은 어둠 속에서 무대 마루를 밟는 쿵쿵 삐거덕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누굴까? 지금 저기서 뭐하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관객들이
조바심을 낼 즈음 조명이 들어오면 괴짜 발명가인 공박사, 그러니까 내가
여전히 쿵쿵 삐거덕거리며 무대 위를 서성댄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공박사가 후닥닥 창문을 열고
밖을 살피다가 한 관객과 눈을 맞춘다. 관객이 무안해서 시선을 피할 만큼
충분히 오래. 그리고 시선을 옮겨 그 주변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다가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린다.
“아무도 없네.”
첫 반응이 중요한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기는커녕 어머, 작은 비명이 들려왔고
소곤소곤 속삭임이 이어졌다. 내가 뭔가를 빠뜨리거나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드레스 리허설 때는 모두가 뒤집어졌던 바로 그 톤이었고 타이밍이었다. 그러고
보니 관객들의 태도가 어째 이상했다. 몇몇 관객은 앞자리 등받이까지 상체를
쭉 빼고는 내 움직임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몰두했고, 어떤 관객들, 특히 짝과
함께 온 여성관객들은 남자 친구의 옆구리로 파고들거나 아예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왜들 저래? 가슴이 섬뜩해서 슬쩍 돌아봤더니 동건이가 등장하고
있었다. 관객이야 관객이니 그럴 수도 있다지만, 동건이의 행동은 더 이상했다.
기다림에 지쳐 졸고 있는 박사 뒤로 몰래 다가와 왁, 놀래야 하는데 허둥대며
무대를 빙빙 돌기만 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러더니 급기야, 녀석이 나를 불렀다.
“박사님. 박사님~ 어디... 가셨나...?”
첫 공연엔 으레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녀석은 초짜배우였다. 나는 조는
척하며 잠시 고민했다. 연습했던 대로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간, 관객들이 깜짝
놀라 소름을 득득 긁어댈 판이었다. 나는 설정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리고 관록 있는 배우답게 슬쩍 관객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내가
코앞까지 갔는데도 녀석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박사님... 박사님... 어디 계실까... 박사님...”
이런 멍청한 자식. 나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망칠 수 있는 건 주인공만이 아니었다.
“나 여깄다.”
가관이었다. 녀석은 흠칫 놀라더니 팔을 뻗어 허공을 더듬거렸다. 영문 모르고
궁정잔치에 갔다가 딸의 목소리에 놀란 심봉사가 따로 없었다. 나는 녀석이 청아!
내 딸 청아! 라고 외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녀석의 어깨를 붙들었다. 마침 대사가
상황에 꼭 어울렸다.
“왜 그래, 블랙. 무슨 일이야?”
녀석은 대답은 않고 동그래진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는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이번에는 내 몸을 더듬거렸다. 아주 공연을 망치기로 작정한 놈이었다. 게다가 거기에
한술을 더 떴다. 대본에 없을뿐더러 이야기 진행이나 작품의 주제와도 전혀 상관없는
괴상한 대사를 주절댔던 것이다.
“박사님... 조금 전에 저기서는 어두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오, 그렇구나. 오...
드디어 해내셨네. 과연 박사님은 천재세요. 박사님도 박사님이 안 보이시는 거죠?
아니면 아직 모르고 계시려나...?”
애드리브라고 하기엔 너무 엉뚱했으므로 나는 그제야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무대
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거긴 내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다른 곳에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앞뒤 옆을 다 살폈다. 내 다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나한테 30년 넘게 귀속됐던 신체의 어떤 부위도 보이질 않았다.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모르지만 나는 투명인간이 되어있었다.
Show must go on. 공연은 계속됐다. 나머지 시간, 그러니까 첫 1, 2 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연은 동건이가 이끌어 나갔다. 동건이가 내 대신 내 대사를 치고는,
“그렇죠, 박사님?” 하고 물으면 내가 “응”, 혹은 “맞아”,라고 추임새를 넣는
식이었다. 관객들은 굉장히 신나했다. 연출이 만들어낸 기발한 장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만약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동건이라면, 그리고 녀석이 별일
겪지않고 남들처럼 평범한 노년을 맞이한다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아아 그건 내 인생이 새롭게 출발하는 찬란한 한때였지.”
라고 회고할 만한 꼭 그런 순간이었다.
‘악몽이다.’
공연 내내 내 머릿속엔 그 네 글자만 맴돌았다. 내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알파선이니 감마선이니 하는 따위의 광선이 난무하는
과학 실험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실수로 그런 광선을 조명으로 달아놓지
않은 바에야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악몽도 좋은 점이 있는데, 깨어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이부자리를 펴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꼭두새벽에 깨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차마 불을 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캄캄한 화장실 거울 앞에서 눈을 감고
내가 아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이름들을 부르고 기도까지 곁들였다. 불을 켜자 감겨있는 눈으로 노르께한
빛이 스며들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가위에 눌려 있다가 몸을 겨우 움직여
푸시시 깨어날 때의 느낌과 어쩐지 비슷했다. 나는 때를 놓칠까 싶어 서둘러
다시 한 번 신들의 이름을 불렀고, 기도를 살짝 수정 보완했다.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옵나이다만, 제가 주연을 맡은
것까지 악몽에 포함시키지는 말아주시기를...’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기도가 통했던 걸까? 거울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빠르게 줌인 클로즈업됐다. 그 얼굴은... 애석하게도 내가 아니었다. 몹시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어떤 남자였다. 나는 눈을 몇 번
끔벅거렸고 이내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4
그건 거울 맞은편 벽에 걸어놓은 싸구려 복제화의 절규하는 남자였다. 절규를
치우자 거무죽죽한 곰팡이 얼룩이 드러났다. 차라리 절규가 나았다. 나는 절규를
다시 제자리에 걸고는 좌우가 뒤바뀐 절규를 응시하며 그날, 전날, 전전날, 전
전전날, 일주일 전, 한 달 전, 일 년 전,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모든 순간순간을
몇 만 번이고 되돌려 보며 곱씹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내가
투명인간이 된 이유를 나로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옛말 그른 거 없다던가? 꼭 그랬다. 시간이 약이었다. 예외 없는 규칙 없다는
규칙이 거기에 적용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거울 앞에서 며칠을
보내자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심지어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투명인간이 뭐 별 건가?
장동건이나 원빈은 타고난 얼굴 하나만 있으면 된다. 비극을 하건 희극을 하건
액션을 하건 멜로를 하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얼굴에
있는 80개의 근육 중에 단 한 개도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저 클로즈업으로
카메라만 쳐다보고 있으면 된다. 어차피 화면을 보는 사람들이, ‘아, 슬픈데
잘 생겼네.’혹은 ‘오 유쾌한데 잘생겼네.’라고 알아서들 감동해줄 테니까.
하지만 나머지 99%의 배우들은 천 개의 가면을 챙겨두고 그때그때 맡는
가면을 골라 써야 한다. 주제도 모르고 장동건이나 원빈 흉내를 냈다간,
“슬픈데 쟤 왜 저래?” 라거나 “야, 채널 돌려.”라는 소리나 들을 테니까.
다행히 나는 장동건도 원빈도 아니었다. 나는 짧지만 깊이 고민했고 인터넷을
뒤져 몇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떠올라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그 즐거운 떨림은 식탁에서 홀로 낮술을
드시던 아버지가 이렇게 소리쳤을 때, 깨져버렸다.
“야 이 자식아, 니가 아무리 그렇게 됐다 그래도 그렇지,
집에서까지 꼭 그렇게 홀딱 벗고 돌아다녀야 되겠냐!”
나는 깜짝 놀라 내려다보았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만져보니 손가락질 받을 차림새는 아니었다. 추리닝 바지에 면 티셔츠,
거기에 이례적으로 양말까지 신고 있었고, 심지어 팬티는 두 개나 입고 있었다.
안 보여서 입은 줄 모르고 덧입은 거였다.
“저 입을 만큼 입었는데요. 한 번 만져 보실래요?”
“내가 왜... 니 알몸을 만져? 니 알몸을 만지는 건, 너 홀딱 벗고 뛰어다녀도
귀엽던 다섯 살 때까지로 충분했다.”
아버지는 나를 만져보지 않았고, 내가 일상적인 품위 정도는 지키며 산다는 걸
끝내 믿지 않았다.
역시 가족 간 대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모처럼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더니 생각도 못 했던 문제가 드러났잖은가?
제기랄, 소설 속의 투명인간만 생각했지 정작 내 실제 몸은 살펴볼 생각도 안 하다니...
투명해진 것은 내 몸뚱이만이 아니었다.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내 몸에 닿는
즉시 투명해졌다. 내가 입거나, 쓰거나, 신거나, 걸치거나, 혹은 손을 대기만 하면
그게 뭐든 사라졌고, 내 몸에서 벗어나야 형체를 드러냈다. 가면을 쓰거나 얼굴에
붕대를 감거나 두꺼운 분장을 해도 답답하기만 할 뿐 그냥 투명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주머니를 탈탈 털어 주문한 각양각색의 서클렌즈며, 가발, 모자, 깃이 커다란 바바리코트,
특히나 공들여 고른 저자극성 분장용 화장품 세트 따위가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고 몸에 닿는 모든 것이 투명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동차나, 텔레비전,
침대, 책상, 의자 따위의 고정된 물건들은 내가 온몸으로 감싸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연극으로 친다면 소도구는 투명해졌고 대도구는 멀쩡했다.
그건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차라리 손대는 모든 것이 투명해졌다면 자유의 여신상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한 것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카퍼필드 정도는 떠돌이 약장수 정도로
취급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지구 전체로 보면 유익한 일이니 그것으로 위안 삼았다.
내가 땅을 밟고 다닐 때마다 지구 전체가 투명해져 버린다면 다들 놀라 까무러치지 않았을까?
한 번은 화장실 거울 앞에서 담배를 피워보았다.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는 보이질 않았다.
기도를 타고 들어간 담배연기 또한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연기를 내뱉자 내 얼굴 부위로부터
3 센티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꽤나 기이한 광경이었다. 공중에서
허연 도넛이 툭 튀어나온다든가, 허공에서 두 줄기 폭포 같은 연기가 훅 뿜어져 나온다거나
하는 모습들 말이다. 몇 대를 연거푸 피웠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둘러봤더니 화장실이 온통 뿌옜다. 에구머니, 놀라 환풍기를 돌리려는데 하필 어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슬쩍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기침 섞인 고함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런 썅놈의 새끼... 그래 그 꼴을 해가지고 고작 한다는 짓이...”
입안에 아직 연기를 머금고 있어서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그 정신머리로 뭐가 될래? 죽을힘을 다해 벌어도 아쉬울 나이에 그 꼴이 된 것도 모자라서,
돈을 태워서 연기로 날려버려! 얘가, 얘가 아직도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아유 이 자식아,
니가 그러니까 그 꼴이 되지!”
다행히 다른 문제는 없었다. 나는 소리를 낼 수 있었고, 냄새를 피웠으며, 만져졌다. 손바닥에
혀를 대보니 여전히 짭짤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그 오감 중에
단 하나의 감각에서 소외된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별일 아니었다. 내 몸의 1/5, 즉 20%에
문제가 생긴 것뿐이니까. 냄새가 나지 않거나, 소리가 나지 않거나, 만져지지 않거나, 혹은 맛이
없는, 다른 20%가 부족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뒤집어 보면 무려 80%나 정상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우사인 볼트보다 20퍼센트 정도 느리다고 해서, 그러니까
100미터를 대략 11.5초 안에 뛰지 못한다고 해서 느림보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한다면,
그 손가락을 부러뜨려야지 느림보 인간을 탓할 일인가? 문제는 그렇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날 이후 내 활동 영역은 다시 화장실 인근 3미터 내외로 제한됐다. 도저히 거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이렇게 됐으니, 언젠가 느닷없이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 순간을 놓치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종종 거울 속에 절규 대신
아버지가 나타나 말릴 새도 없이 내 등에 쿵, 부딪쳤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절규만큼이나
일그러진 얼굴로 절규했다.
“야 이 자식아, 제발 좀, 투명인간답게 굴어!”
물론 나도 투명인간답게 굴고 싶다.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서 한 2박 3일쯤 지내보고 싶고,
착한 몸매의 여인을 따라가 겁탈은 몰라도 희롱 정도는 해보고 싶으며,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에서 뒹굴뒹굴하며 지중해까지 날아가고도 싶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원수인 돈도
실컷 벌어보고 싶다. 누군가가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줄 알아? 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그럼. 당연하지. 그렇구 말구. 재벌 집이건, 국회의원 집이건,
은행이건, 캐피털 회사건 지나는 길에 한 번씩 들러서 집어오기만 하면 끝이니까. 너무
심한 파렴치한이 되는 건 좀 그렇고 한 곳에서 5억 원씩만, 너무 피곤해지면 안 되니까
하루에 열 군데만, 그거만 해도 하루에 50억 원, 한 달이면 1500억... 아니지 주5일
근무로 치면 대략 1000억 원 정도니까 그 생활을 1년만 하면, 포브스지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해도 크게 돈 걱정은 안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 황홀한 상상 뒤엔 항상 비극적인 가정이 따라붙는다. 여탕에서, 으슥한
골목에서, 비행기에서, 혹은 은행에서 투명인간답게 굴다가 느닷없이 불투명인간으로
되돌아간다면? 누누이 말했지만 나는 예고도 어떤 징후도 없이 이렇게 돼버렸다.
물론 나는 불투명인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세종로 네거리에서
벌거벗고 만세라도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불투명인간으로 돌아가자마자 감옥으로
간다거나 전자발찌를 차고 싶지는 않다. 나를 한심하게 여긴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인정한다. 나는 그리 대범한 사람이 아니다. 평생 동안 세 번쯤은 대범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어렵지 싶다.
내가 투명해지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그동안 연락이 두절됐던 수이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늘 보고 싶을 거야.’
습관적으로 답장을 보냈다.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별 통보였다. 며칠 동안 그 문자만 쳐다보며 서성대다가 문득
그녀의 목덜미가 생각났다. 그녀는 내가 하는 농담을 좋아했다. 시답잖은 농담에도 늘
목을 젖히며 까르르 한참이나 웃곤 했다. 나는 미뤄뒀던 답장을 보냈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잠시 후 그녀의 답장이 도착했다.
‘농담이지? 제발 농담이라고 해 줘. 안 그럼 불안해서 미쳐버릴 거야.’
나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농담은 아니고 내 마음 말이야.’
더 이상의 답은 없었다.
며칠 후. 너를 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둥, 너와 함께 지냈던 모든 순간이 그립다는 둥,
핸드폰 액정에 저절로 습기가 찰 것 같은 장문의 징징대는 문자를 보냈다. 뜻밖에도 즉시
답장이 날아들었다.
‘잘못된 번호입니다. 확인 후 재전송 바랍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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